카라바조 로마에서 도망 Caravaggio Flees Rome
카라바조는 악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그림에 담긴 열정은 종종 그의 삶에 반영되었다. 1604년 이전의 3년 전 라이프 스타일을 묘사한 고지에 따르면 "보름의 일을 한 후 그는 데리고 다니는 하인과 함께 한두 달 동안 검을 옆에 차고 테니스장 한 구장부터 다음 구장까지 으스대며 다녔고 싸움이나 논쟁에 개입되기도 하였다. 그와 어울리는 것이 가장 어색할 것"이라고 재조명했다.
1606년 5월 28일 테니스 경기 점수에 대한 논쟁 끝에 싸움을 벌이던 중 상대인 라누치오 토마소니(Ranuccio Tomassoni)를 칼로찔러 죽이고 사형 선고로 로마에서 도망쳤다.
Supper at Emmaus, Caravaggio
1601, Oil on canvas, 141 cm × 196.2 cm (56 in × 77.2 in), National Gallery, London
살인 혐의로 카라바조는 나폴리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강력한 콜론나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로마 당국의 관할권 밖에서 안전하게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는 나폴리에서도 가장 유명해졌다. 그가 여기 있는 동안 <엠마오의 저녁식사 Supper at Emmaus> (1606년, 밀라노 갤러리아, 브레라)는 개별 인물들이 어둠의 배경에서 나오는 하층 주점 장면으로 취급한 것 같은 만찬장면을 그렸다. 1607년 나폴리에서 그는 열성적으로 일했지만 이 시기의 그림 대부분은 현재 유실되었다. 살아남은 그림들은 <로사리의 마돈나 Madonna of Rosario>(1606-7, 쿤스티스토리체스 박물관, 비엔나),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 Seven Works of Mercy>(1606-7, 피오 몬테 델라 미세리코르디아, 나폴리 교회), <침례 요한세례 요한의 머리를 가진 살로메 John the Baptist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1609-10, 국립 미술관, 런던), <예수 그리스도의 태형 Flagellation of Christ>( 1607, 카포디몬테, 나폴리)은 고전주의와 매너리즘의 전통을 연상시키는 인물의 모델링에서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경우 어둠과 빛의 관계에 국한되어 있으며 인간 현실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을 높이는 데 사용된다.
Madonna of the Rosary Italian: Madonna del Rosario, Caravaggio
1607, Oil on canvas, 364.5 cm × 249.5 cm (143.5 in × 98.2 in),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The Seven Works of Mercy, Caravaggio
1607, Oil on canvas, 390 cm × 260 cm (150 in × 100 in), Pio Monte della Misericordia, Naples
1607년 초에 카라바조는 몰타에 있었고, St John의 명령으로 알로프 드 위냐쿠르 Alof de Wignacourt 의 초상화 두 개(그 중 시동과 함께 있는 알로프 드 위냐쿠르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됨), 발레타 산 조반니 대성당의 <저술하는 성 제롬 St Jerome Writing> <세례자 요한의 참수 The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을 그렸다. 이러한 작업 중에도 카라바조는 동료기사와 싸움을 벌인 혐의로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탈옥 시칠리아 섬으로 도주한다. 몰타의 기사들은 대영주 허락없이 몰타를 떠날 수 없다는 의무를 어긴 카라바조의 기사작위는 취소되고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림 <목 잘린 세례 요한>은 산 조반니 대성당에서 장기간 철거되는 비운을 맞는다. 지금은 이 그림을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다. 나폴리에 머무른 후 Caravaggio는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자신을 차지했던 테마로 돌아와서 그림 자료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Saint Jerome Writing, Caravaggio
c. 1605–06, Oil on canvas, 112 cm × 157 cm (44 in × 62 in), Galleria Borghese
The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 Caravaggio
1608, Oil on canvas,370 cm × 520 cm (150 in × 200 in), St. John's Co-Cathedral, Valletta
Portrait of Alof de Wignacourt Italian: Ritratto di Wignacourt con paggio, Caravaggio
1607–1608, Oil on canvas, 195 cm × 134 cm (77 in × 53 in), Louvre, Paris
죽음 Death
카라바조는 1608년 10월에 도착한 시칠리아에서도 똑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 1610년 7월 18일 라치오(Lazio)의 해변에서의 죽음과 함께 비극적으로 끝난 카라바조는 방랑 기간 동안 <성녀 루치아의 매장 Burial of St Lucy>(1608년, 산타 루치아 알라 바디아 성당, 시라큐스), <라자로의 부활>(The Raising of Lazarus, 1608-9년, 메시나 박물관, 메시나)과 <목동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1608-9년, 메시나 박물관, 메시나) <성 프란치스코와 성 로렌초가 함께 있는 예수 탄생>(Nativity with St. Francis and St. Lawrence, 1609년, 산 로렌조 교회, 팔레르모) <성 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살로메 Salome with the Head of St. John the Baptist>(1609-10, 내셔널 갤러리, 런던) 아마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세례 요한 St John the Baptist>(1610)과 같은 걸작을 만들었다. 그의 사망 상황은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예전에 그와 다툰 적이 있는 한 귀족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아 얼굴울 분별할수 없었다고도 하고, 말라리아병으로 열이 났을 수도 있다. 카라바조가 죽었을 때 그의 그림 경력은 10년이 조금 넘었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게된다.
Burial of Saint Lucy Italian: Seppellimento di Santa Lucia, Caravaggio
1608, Oil on canvas, 408 cm × 300 cm (161 in × 120 in), Chiesa di Santa Lucia alla Badia, Syracuse
The Raising of Lazarus Italian: Resurrezione di Lazzaro, Caravaggio
c. 1609, Oil on canvas, 380 cm × 275 cm (150 in × 108 in), Museo Regionale, Messina
Adoration of the Shepherds Italian: Adorazione dei pastori, Caravaggio
1609, Oil on canvas, 314 cm × 211 cm (124 in × 83 in), Museo Regionale, Messina
Nativity with St. Francis and St. Lawrence
Caravaggio, 1609. 268 cm × 197 cm (106 in × 78 in)
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London) Italian: Salomè con testa del Battista, Caravaggio
c. 1607, Oil on canvas, 91.5 cm × 106.7 cm (36.0 in × 42.0 in), National Gallery, London
카라바지즘 Caravaggism
카라바조의 그림 스타일은 상당히 혁명적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종교와 대중 예술 사이의 다소 엄격한 분리를 유지해 온 '고급 예술'과 '장르' 주제의 엄격한 구분을 고수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다. 주제가 종교적인 이야기든 초상화든 카라바조는 사람과 일상의 사물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뛰어난 독창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모습은 보통 거리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아름답거나 못생겼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보는 사람은 이탈리아의 일상 생활 장면과 진정으로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개인화 된 삶과 예술가의 스튜디오에 배열되어 있는 시각과 인위적인 세계로 보게 된다. 이러한 후자의 측면은 카라바조 전체의 전형인 조명의 극도의 대조를 통해 강조된다. 밝게 빛나는 매끄러운 색의 영역은 전에는 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어두운 그림자와 눈에 거슬리는 대조를 이루며, 뚜렷하고 세속적인 분위기가 우세하다.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것이었고 동시대 사람들의 대다수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라바조는 단순히 성도들에게 거리에서 선발해온 모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성모의 모습을 그의 정부들 중 한 사람의 얼굴로 그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한 세속성은 그 시대의 경건한 교회 신도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의 성모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카라바조의 종교화의 현실적인 스타일은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선 추문에 해당했는데 가톨릭교회는 예술가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신성한 예술을 사용했다고 의심하여 그 존엄성을 강탈한 파문에 이른다.
카라바조가 형식과 도상학 문제에 대해 수행하고 카라바기즘 Caravaggism 의 지지자들에 의해 전파된 혁명은 화가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급진적인 변화의 결과였다. 그의 영향력은 더욱 컸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반적으로 갱신과 변화에 대한 필요성에 대한 반응이었고 그는 이것을 매우 독창적이고 개인적이며 민감한 방식으로 이를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는 사물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묘사, 실물 크기의 형상, 그림 밖에서 나오는 조명,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퍼진 테네브리즘tenebrism과 키아로쿠로의 표현기법의 사용 등 여러 가지 공식을 확립하게 되었다.
카라바지스티 Caravaggisti 에는 오라지오 젠틸레스치(Orazio Gentileschi, 63~1639) 카를로 사라세니(Carlo Saraceni, 1579~16220)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Bartolomeo Manfredi, 1582~1622) 등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포함됐다.
카라바조의 영향력이 특히 강했던 나폴리에서는 현지 Quietism(정적주의: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묵묵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으로 인해 그의 추종자 중에는 스페인계 주세페 데 리베라(Jusepe de Ribera, 1591-1652)와 바티스텔로 카라치올로(Battistello Caracciolo, 1578-1635),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 1613-99) 등이 있었다.
다른 추종자들로는 네덜란드 화가 헤라드 반 혼토르스(Gerrit van Honthorst, 1592-1656) 및 헨드릭 테르브루그헨(Hendrik Terbrugghen, 1588-1629 ) 독일의 아담 엘스하이머(Adam Elsheimer, 1578-1610)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 1598-1664)과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 그의 추종자들은 바로크 예술가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 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 니콜라스 투르니에(Nicolas Tournier, 1590-1639), 조셉 라이트 더비(Joseph Wright of Derby, 1734-97) 등이 추종자들이었다. 카라바조 자신은 학교를 설립하고 싶은 소망이 전혀 없었지만 그들은 또한 집단적으로 카라바지스티Caravaggisti 화가로 알려져 있었다.
유럽 회화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의 마음가짐의 채택에서부터 그의 회화 스타일에 대한 긴밀한 준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그의 대우는 인물의 3차원적 품질을 향상시킴으로써 이탈리아 회화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또한, 예술가들이 그림의 초점을 조절할 수 있게 하여 극적인 내용을 증가시켰다. 렘브란트와 같은 주인의 손에는 더 큰 특성화와 감정 깊이가 만들어졌다. 카라바기즘은 네덜란드 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완전히 이용되었고,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예술가들은 가톨릭 반개혁 운동과 관련된 종교사 그림을 작업했다.
'카라바지즘 Caravaggism'은 1620년대 후반 로마에서 처음 유행에서 벗어났고,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 특히 시칠리아에서 지속되었다. 플랑드르,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 프랑스 동부에서는 1650년대까지 인기를 유지했다. 카라바조 자신의 명성은 18세기에 감소했지만 19세기에 다시 부활했다.
평판 Reputation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바조의 시적 사실주의는 구스타브 쿠르베트(Gustave Courbet, 1819~77),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83), 폴 세잔( Paul Cezanne, 1839~1906)과 같은 19세기 화가들을 매료시켰지만,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의 업적은 르네상스의 저명한 미술학자 버나드 베렌슨(Bernard Berenson, 1865~1959)을 비롯한 평론가들로부터 제대로 검토되었다. 유럽 회화에서 그의 스타일과 역할을 정의한 미술사학자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 1890-1970)는 “카라바조가 없었더라면 리베라도, 베르메르(Jan Vermeer)도, 라 투르도, 렘브란트(Rembrandt)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들라크루아와 쿠르베, 마네의 그림도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카라바조의 미술사적 의의를 평가했다. 카라바조는 이제 신비스러운 과거를 가진 천재 화가가 됐다. 바로크 미술의 대가이자 빛과 어둠의 마법사였던 천재 화가, 카라바조는 당대에 가장 높은 명성을 누린 동시에 가장 악명을 떨친 시대의 반항아였다. 그는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림을 그려 서양 예술사에서 ‘회화의 이단아'로 평가받고 있다.
20세기 미술 역사가 앙드레 베른-조푸루아(André Berne-Joffroy)는 " 현대 회화는 카라바조(Caravaggio)의 작품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Caravaggio의 작품은 전 세계 최고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그림: wikipedia.org
https://blog.naver.com/goodoz/221860547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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