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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이 여행

알폰스 무하전 관람 후기, 도슨트 강추

by multimillionaire oz 2020.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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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아트 뮤지엄'에서 개관 특별전으로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 알폰스 무하전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알폰스 무하의 판화, 유화, 드로잉 등 오리지널 원작 230여 점을 작가의 삶 여정에 따른 작품 변화에 따라 5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은 "SECTION 1_ 연극 포스터, 사라베르나르와 무하 / SECTION 2_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광고 포스터 / SECTION 3_ 대중을 위한 인쇄 출판물 / SECTION 4_ 매혹적인 아르누보의 여인들/ SECTION 5_ 고국을 위한 애국적 헌사"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파리 시절 ‘무하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넝쿨 같은 여인의 머리카락, 독특한 서체 등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체로 제작된 아르누보 양식의 포스터에서부터, 무하가 고국으로 돌아가 슬라브 민족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역사적 화풍으로 고국을 위한 작품들을 그리며 생을 마감하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 '이반 렌들'의 컬렉션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습니다. 이 컬렉션은 2013년 체코에서 공개된 후 밀라노, 뉴욕 등을 거쳐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된다고 합니다. 무하의 그림들은 당대에도 독특한 스타일로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현대에까지 그 인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은 아르누보 양식의 아름다움과 대중을 생각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한 체코 국민 화가로서 무하의 삶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알폰스 무하展 SECTION 1

연극 포스터, 사라베르나르와 무하 Theater, Sarah Bernhardt and Mucha

프랑스 파리에서 가난한 유학 생활을 하던 무하는 1894년 우연히 사라 베르나르의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맡아 그리게 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연극은 당대의 가장 광범위한 대중예술의 하나였으며, 무하가 포스터를 그린 베르나르의 연극은 <햄릿>, <로렌자치오>, <사마리아 여인>, <토스카> 등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배경을 두고 낭만적이고 통속적 성격을 지닌 극 들이었습니다. 무하의 포스터들은 베르나르가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연극 그 자체를 광고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성녀 사라'로 일컬어진 당대 인기 여배우의 스타로서의 대중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내고 부각시켰습니다. 당시 포스터들과 완전히 다르게 무하는 좁고 세로로 긴 실물 크기의 포스터를 제작했고 이는 연극의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비잔틴 양식에 영향을 받은 무하의 이국적이면서 세련된 디자인은 세속적인 요소를 신성함과 결합시키면서 화려함으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01년까지 무하는 베르나르의 포스터뿐 아니라 그녀가 공연하는 르네상스 극장의 무대장치와 의상까지 담당했습니다. 이 눈부신 성공은 그에게 사회적 명성을 가져다주었고, 수년 동안 작품의 성격과 방향도 결정지었습니다.

알폰스 무하展  SECTION 2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린 광고 포스터 The Art of Advertising

현대 광고는 아르누보 시대 선진 인쇄기술의 발전과 함께 급성장한 상업문화와 포스터 미술이 등장함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연극 포스터로 명성을 얻은 무하는 곧 여러 종류의 광고와 상품 디자인 의뢰를 받으며 경제적 안정과 대중적 인기를 쌓아갔습니다. 무하는 “대중의 감각을 자극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그들을 깨우기 위해서, 예술가는 유혹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1896년에 비스킷 회사 르페브르 위틸사와 장기 계약을 시작했고, 이후 식음료뿐 아니라 담배, 세제와 향수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다양한 상품의 홍보용 포스터를 제작했습니다. 무하는 광고 포스터를 마치 회화 작품처럼 취급했는데, 얼핏 보면 광고의 목적은 부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는 그의 광고 포스터에 핵심적인 회화의 모티프는 양식화된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였습니다. 포스터는 마치 제품을 사면 지루한 일상을 탈출해 특별하고 이지적인 공간의 일부가 될 것 같은 환상을 보여줍니다. 당시 새로운 자유와 구매력을 가진 청중으로서 신여성에게 개방된 사회와 교차하면서, 대중은 광고 포스터 속 화려한 무하 스타일을 소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폰스 무하展 SECTION 3

대중을 위한 인쇄 출판물 Exhibition poster, Magazine and Print

무하는 벨 에포크 시대 파리가 사랑한 장식예술가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무하의 이러한 성공은 그가 산업화와 인쇄술을 통한 대량생산 시대에 맞추어 기술적 변화를 흡수하고, 자신의 영감을 작품 속에서 독창적으로 표현한 결과였습니다. 무하가 “나는 닫혀있는 응접실이 아닌, 사람들을 위한 예술 활동을 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귀족 일부가 아닌 대중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였고, 예술이 소통의 수단이라 믿었습니다. 무하는 19세기 말 유럽 아방가르드 학파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목표인 대중을 위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달력과 잡지 간행물 같은 상업적인 출판물을 작업하였습니다. 그래픽 예술가들의 산실이었던 <살롱 데 상>에서의 개인전 이후 세계 순회전을 거치며 더 많은 전시회, 출판물의 요청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그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초대받아 여러 관의 장식을 디자인하며, 오스트리아관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관의 포스터도 제작했다. 이때 기여를 인정받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알폰스 무하展 SECTION 4

매혹적인 아르누보의 여인들 Art Nouveau and Mucha Style

'아르누보'는 19세기 후반 인상파 이후 보이는 것에 치중한 예술 흐름에 반대하며 자연을 더 연구하고 내면세계를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아르누보는 무하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새로운 예술 장르는 많은 예술가들과 파리 시민들에게 갑작스러운 파급 효과를 내었고, 처음에는 ‘무하 스타일(Le Style Mucha)'이라 불렸는데 이는 곧 아르누보와 동일시되었습니다. 그의 일러스트들은 점차 양식화되어 성숙한 아르누보 스타일을 구사해 갔습니다. 특히 별 이나 원, 왕관과 같은 눈에 띄는 몇 가지 장식 언어들은 여러 작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면서 순수하게 장식으로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글과 연결되어 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당대 파리의 일부 예술가들이나 비평가들은 무하의 작품들 속 미인들의 물결치듯 풍성하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무하의 마카로니'라며 비아냥 거렸지만 대중적 인기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하의 장식 패널은 인테리어를 목적으로 하여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었고, 다양한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가까이 두고 즐길 수 있었습니다.

아르누보 Art Nouveau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유행한 예술 사조로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을 뜻하며, 산업혁명 이후 기계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연에서 모티프를 얻은 화려한 장식이 특징입니다. 특히 나무 덩굴, 꽃잎, 조개 모양에서 따온 장식적인 곡선 등을 조형적으로 접목시켰습니다. 아르누보는 상징주의(Symbolism)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아르누보가 예술의 형식에 관련되어 있다면 상징주의는 예술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르누보는 당시 사람들의 내면이 원하는 바를 읽고 이를 형상화하여 실용예술로서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화풍과 특징적인 장식, 섬세한 색감 및 풍부한 아름다움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아르누보의 진정한 철학은 누구나 평등하게 예술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1880년대 아르누보는 벨기에에서 먼저 싹터서 세기 전환기를 풍미하며 프랑스의 유행을 휩쓸었다. 아르누보의 유럽 내 다양한 분파로 오스트리아에서는 분리파(Secession), 독일에서는 유겐트스틸(Jugendstil), 영국에서는 모던 스타일, 스페인에서는 스틸레 모데니르타(Style Modernista)로 불리며 각각의 문화적 성향에 따라 차별화된 예술 양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을 거쳐 근대적인 장식 미술인 '아르데코'로 그 명맥이 이어지며, 모더니즘에 대한 20세기 디자인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알폰스 무하展 SECTION 5

고국을 위한 애국적 헌사 Patriotic Tribute to Czech

파리와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슬라브 민족에 대한 정체성과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1910 년 그는 체코로 귀향했습니다. 가장 처음 프라하 시청사의 시장실을 위한 벽화를 맡아 그렸고, 체코에서 체류하는 동안 상업적인 작품은 만들지 않았으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자선단체 등을 위한 포스터는 다수 작업했습니다. 무하는 1918년 체코슬라비아가 독립한 후 고국의 지폐뿐 아니라 국가의 엠블럼 등을 무상으로 디자인했습니다. 무하는 재능의 환원을 통해 민족의 자주성과 힘을 고취시키기 위해 전심전력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20여 년에 걸쳐 체코의 역사와 민족애를 담은 20개의 기념비적인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완성했다. 파리 시절 작업했던 아름다운 이미지들과 달리 말년의 무하의 이 대작은 웅장하고 역사적인 화풍을 보여줍니다. 1939년 그는 나치의 프라하 침공 당시 체포되어 심문의 후유증과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세기말 한 시대의 양식을 선도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가졌던 거장의 장례식에는 나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을 만큼 무하는 체코를 대표하는 화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무하의 전시된 상업적인 작품들은 무하의 이 작품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를 위한 고행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는 작품이 워낙 크기도 하고(몇몇 그림은 6x8m에 이른다) 템페라(달걀노른자, 벌꿀 등을 접합체로 쓴 투명 그림물감) 기법을 차용했으나 무하는 순수한 달걀 템페라가 아닌 달걀노른자에 빻은 안료와 물, 기름 등을 적절히 섞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독특한 화법은 투명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지만, 손상되기 쉬워서 표면이 쉽게 갈라진다는 흠이 있습니다. 대형 작품이라서 운반도 쉽지 않아 이동 전시 시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 수 있어 해외 전시 자체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체코 정부의 국보이기도 한 이 작품이 최근 무리한 해외 전시 추진으로 몸살을 앓고 있고, 화가의 손자이자 무하 재단 이사장인 존 무하(68)는 체코 정부에 요구한 기증 조건이 상당 부분 이행되지 않았다며 소유권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기 계획이 있었으나 취소되고 이번 전시회에서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프라하는 무하의 도시입니다. 하지만 프라하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없는 <슬라브 서사시 The Slav Epic>입니다. 슬라브 서사시는 무하(Alphonse Mucha, 1860~1939) 평생의 역작이었습니다. 무하는 1000년이 넘는 슬라브 민족의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무하는 1912년부터 작업을 시작해 1926년에야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 와중에도 18번(The Oath of the Youth under the Slavic Linden Tree)은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

<슬라브 서사시>는 무하의 바람과 달리 프라하에 정착하지 못했다. 무하와 그의 후원자인 찰스 크레인은 <슬라브 서사시>를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10주년을 기념해 프라하시에 공식적으로 기증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과 공산정권의 박해 때문에 <슬라브 서사시>는 체코 모라비아 시의 작은 성에 피신해 있었다. 그러다 2012년이 되어서야 <슬라브 서사시>는 프라하에서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그나마도 2016년 말까지만 프라하에서 전시가 이뤄진 후 현재는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프라하 국립미술관에 전시된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중 '본향의 슬라브인들' 사진 Wikipedia

이반 렌들 “컬렉션 다큐멘터리

Ivan lendl Collection Documentary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인 '이반 렌들의 무하 컬렉션이 수집되어 프라하에서의 첫 전시를 준비하기까지의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1982년 렌들은 예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테니스 코치로부터 무하의 아들인 '이르지 무하'를 소개받았고, 무하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감명받아 작품 수집을 시작해 개인 최대 규모의 컬렉션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더 많은 사람들과 작품을 공유하기 위해 전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컬렉션은 2013년 체코에서 첫 공개 후 이탈리아, 미국 등을 거쳐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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