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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畵 톺아보기/말씀이 있는 그림

마 5:1-12 - 예수는 빛이다 [주께서 오신다!]

by multimillionaire oz 201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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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imo Rosselli

산상 수훈 (1439 – 1507)

Cappella Sistina

주께서 오신다!

금년 2월의 네 주일은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부터 여덟째 주일에 해당된다. 주현절(epiphany)은 성탄절과 사순절 사이에 놓여 있는 절기로 예수께 신성이 나타난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아기 예수를 동방박사가 방문한 사건(마 2:1절 이하), 예수의 정결의식(눅 2:22 이하), 또는 예수의 세례(마 1:9-11) 전승이 이에 해당된다. 각각의 전승은 예수의 신성을 직간접적으로 보도한다.

세계교회와 더불어 우리는 2월 한 달간 주현절을 기억하고 그것의 영적 현실에 참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설교자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예수가 신이라는 사실, 또는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의 근거는 무엇인가? 더 줄여서 이렇게도 질문할 수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의 대답은 간단한 게 아니다. 어느 유대교 학자는 그리스도교를 향해서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세상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했을 텐데, 예수 전이나 후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 않느냐? 옳은 지적이다.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인간은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폭력과 전쟁이 그치지 않고, 사람의 교만과 절망도 끝나지 않았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무슨 근거로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에게 신성이 드러났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 앞에서 한국 교회가 제시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예수를 만난 경험이다. 소위 예수 영접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경험의 차원으로만 말하면 사이비 이단 추종자들이 월등하다. 사람의 경험은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 된다. 또 어떤 이들은 삶의 변화를 말한다. 삶의 변화도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의 충분한 근거는 아니다. 왜냐하면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과 이념들이 세상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축귀와 치유도 뾰족한 근거는 아니다. 어디서나 손쉽게 만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묻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의 근거는 무엇인가? 필자는 지금 이에 대한 대답을 시도하지 않겠다. 뒤에서 부분적으로 제시될 것이다. 신학적으로 완전한 대답이 주어진 것도 아니다. 종말까지 이어져야 할 신앙적 화두라 보는 게 옳다. 어쨌든지 오늘 설교자들은 주현절이 담지하고 있는 신학적인 무게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이 있어야만 성서텍스트의 고유한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며, 최소한 들어갈 마음을 먹게 될 것이다.

 

2011년 2월6일/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가난한 사람들

마 5:1-12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12절은 산상수훈의 전문이라 할 수 있는 ‘팔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3절에서 10절까지 각각의 절이 한 항목씩 여덟 개를 거론한다. 11절도 또 하나의 항목에 포함시킬 수 있긴 하지만 문장 구조로 볼 때 제외시키는 것이 옳다. 앞의 팔복 문장은 복 받을 자를 3인칭으로 다루지만, 11절은 2인칭으로 다룬다. 11절은 팔복을 제자들의 실존에 적용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달리 각각 네 개 항목으로 복과 화를 다루고 있다.(눅 6:20-26)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을 설교 앞부분에서 필요한 만큼 비교 분석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가난’이다. 누가복음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지만 마태복음은 이를 약간 비틀어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양쪽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고,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심령, 즉 마음까지 가난하게 된다. 마태복음이 거론하는 나머지 항목도 대다수는 가난과 연결된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도 결국 삶의 무게에 눌린 가난한 자라고 보아야 한다. 팔복의 핵심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명제에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말인가? 이것을 설교자가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다수 설교자들은 가난을 주제로 설교하지 않는다. 기복주의적인 설교가 주를 이룬다. 그들이 외치고 있는 복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이다. 그런 설교가 효과를 낸다. 그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헌금과 기도까지 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아무리 뻔뻔스럽게 부(富)를 설교한다고 하더라도 가난이라는 현실을 외면하지는 못한다. 예수를 잘 믿어도 사업에 실패할 수 있고,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세태는 가난의 세습까지 거론되어야 할 실정이다. 설교자들은 가난의 현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다. 일종의 편법이다. 하나는 지금 가난해도 믿음만 좋으면 하늘나라에 가서 잘 살게 된다는 주장이다. 신앙적인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기복주의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다른 하나는 믿음 생활을 더 잘 해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도록 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가난이 불신앙의 결과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 강단은 철저하게 세속적인 축복에 기울어져 있는 상태이다. 조금 의식이 있는 설교자들은 소위 ‘청부론’을 내세운다. 도대체 깨끗한 부라는 게 가능할까? 설교자들은 이런 부분을 신학적인 차원과 사회과학적인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자들이 가난한 자의 복을 가난에 대한 미화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삶이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은 실제로 삶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는 인간의 영혼까지 파괴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처럼 탁발수도승이 되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돈이 없으면 실제로 불편한 세상에서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팔복이 말하는 복의 실현은 미래형이다. 문법적으로도 첫째와 여덟 번째 복을 제외하면 미래형이다. 첫째와 여덟 번째 항목은 천국을 소유한다는 약속인데, 천국은 지금 당장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이 두 항목도 역시 미래의 차원이다. 가난한 자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이런 말은 지금 당장 부자로 살기를 원하는 청중들에게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것이다. 설교자는 이런 부분에서 청중들과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청중들의 영적 관심을 미래로 돌려야 한다. 신약성서가 바로 그 종말론적 미래를 생명이 완성되는 때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부활도 역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희망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난한 자의 복도 당연히 미래에 실현된다고 봐야 한다.

그 미래는 이미 현재에 개입되어 있다. 종말이 이미 현재에 돌입해 있듯이 말이다. 이건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다. 가난한 자는 하나님 이외에는 희망을 둘 대상이 없는 이들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만 희망을 거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 역설적인 자유다. 이 자유를 확보한 사람은 이미 복이 있는 사람이다. 세상에 재물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자신이 신경을 써야 할 문제가 많은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가 없는 사람은 화 있는 사람들이다.(눅 6:24, 25)

위의 설명은 그것 자체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팔복이 예수의 약속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가난한 자의 복을 주장했다면 단지 값싼 위로에 불과하지 복음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한 사람이 이 사실을 진리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약속을 그의 운명과 함께 받아들인다.

팔복을 예수의 약속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삶의 태도를 보이는가? 이것은 설교자 각자가 풀어야 할 숙제이다. 필자는 두 가지로 생각한다. 첫째는 소극적으로 부에 대한 의존성을 거부(축소)하는 것이며, 둘째는 적극적으로 예수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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