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名畵 톺아보기/말씀이 있는 그림

신 30:15-20 - 예수는 빛이다 [하나님이 생명이다]

by multimillionaire oz 2019. 11. 22.
반응형

하나님이 생명이다. The Finding of Moses , painting by  Sir Lawrence Alma-Tadema , 1904

 

2011년 2월13일/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하나님이 생명이다

 

신 30:15-20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행한 설교라고 한다. 출애굽 이후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행해진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례 모음집이라 할 수 있다.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보면 이 문서는 연대기적으로 훨씬 후에 일어났던 바벨론 포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신명기만이 아니라 구약의 거의 모든 문서는 바벨론 포로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모세오경은 물론이고, 많은 예언자들이 이 시기에 활동했으며, 성문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바벨론에 의한 이스라엘의 파멸은 성서기자들로 하여금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하게 했다. 하나는 자신들이 믿고 따른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능력이 크신 분이라면 자신들이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왜 몰락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들이 찾은 대답을 가리켜 신명기사관이라고 한다. 그것을 간단히 요약하며 다음과 같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살 것이며, 말씀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면 죽을 것이다. 이것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반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오늘 본문도 16절과 18절에서 이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신명기사관은 옳은가? 설교자는 일단 이런 질문의 지평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설교자가 들어간 깊이만큼 성서의 세계는 열릴 것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면 흥하고, 우상을 섬기면 망한다는 신명기의 진단은 정확한 게 아니다. 이스라엘은 흥한 적이 거의 없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도 근동의 패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 설교자는 역사의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구약의 진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것이 설교자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넘어서려면 성서텍스트의 은폐된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 구약의 표면적인 진술을 그대로 전하게 되면 성서해석의 아전인수로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잘 사는 이유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찾고, 동남아 국가들이 못사는 이유를 우상숭배 탓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제국의 폭력이 고대 아시리아, 바벨론, 또는 로마나 오늘의 미국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도 이런 정치 경제적인 힘과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신명기사가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쑥대밭이 된 자신들의 운명을 역사적으로 반성하는 중이다. 국가의 운명은 단순히 정치나 경제 논리차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달려 있다고 본 것이다. 핵심은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금송아지로, 또는 바알과 아세라와 몰록 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우상의 본질은 동일하다. 풍요와 다산에 대한 약속이다. 우상숭배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거는 행위이다. 풍요와 다산은 사람이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도 바로 이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우상을 자본주의에서 발견한다. 자본 숭배와 금송아지 숭배는 다를 게 무엇인가? 오늘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름만 그리스도교 신앙을 붙였을 뿐이지 실제로는 우상숭배에 기울어져 있다. 이것은 흔하게 듣는 말이지만 설교자가 이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는 얼핏 보면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여호와 신앙도 생존과 번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표면적인 것이다. 여호와 신앙은 불가시적인 것에 근거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이, 단지 약속만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우상숭배는 실증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다른 하나는, 이것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차이인데, 다음과 같다.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 통치에 의존한다면, 우상숭배는 안전과 번영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여호와 신앙에서 번영은 부차적이고, 하나님이 우선적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조건 하나님의 명령, 규례, 법도를 지켜야 했다.(16절) 그래야만 창조자 하나님의 소유인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여호와는 바로 그들의 생명이다.(19절) 정리하면, 여호와 신앙은 하나님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이며, 우상숭배는 물질적인 토대가 바로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에 매달리는 삶의 태도이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파멸된 것은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았다.

설교자는 위 본문에서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해야 한다. 생명 지향적 삶의 태도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라는 사실이 핵심이다. 신명기가 본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물적인 만족만을 맹렬히 추구하는 이 시대에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과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다. 여기서 설교자들의 신학적이고 영적인 분발이 필요하다.

 

 

2011년 2월20일/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 5:38-48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위 본문은 소위 ‘다섯 반명제’ 목록(마 5:21-48) 중에서 넷째와 다섯째 항목에 속한다. 마태복음은 이 반명제를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율법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따라야 할 마태복음 기자의 이런 언급은 예상 밖이다. 여기에는 마태공동체의 고민이 놓여 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함락될 때까지 이어진 유대 전쟁은 유대교를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당시 유대교 안에서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고 있던 초기 그리스도교 집단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유대교의 율법을 따르든지 아니면 유대교 밖으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당시에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 그리스도교는 일찌감치 유대교 밖으로 나갔다. 지역적으로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었지만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한 유대 그리스도교는 불가능했다. 이들은 결국 유대교의 요구를 어느 정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마태복음은 율법의 근본인 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율법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오히려 율법보다 더 절대적인 의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이 반(反)명제로 표현된 것이다.

두 항목을 나누어 검토하자. 하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이다. 이것은 원래 좋은 뜻으로 시작된 율법(규범 윤리)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정신이기도 한다. 이런 법의 강제규정이 없으면 사람은 당한 것보다 더 심하게 앙갚음을 한다. ‘눈은 눈으로’는 정의 사회를 위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예수는 악한 자를 아예 대적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한다. 정의를 넘어서는 윤리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이런 절대적인 무저항, 비폭력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단적인 예가 성전(聖戰) 개념이다. 이슬람과의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교인 가톨릭과 개신교끼리도 전쟁을 벌이곤 했다. 무저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비주류에서만 받아들여졌다. 퀘이커 교도나 아미쉬 종파,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폭력적인 사태 앞에서 무저항이 만능인가? 개인들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이다. 여기서 원수는 물론 이방인이다. 유대사회에서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이방인 나그네와 과부를 돌보라는 가르침도 많다. 고대사회에서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도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이스라엘이 근동 지역에서 생존할 수 없었다. 적자생존의 차원에서 타당한 윤리이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진멸하라는 명령도 이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대한 근거로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원수사랑은 과연 가능한가? 그렇게 노력하라는 당부일 뿐이지 실제로는 불가능한 말씀인가?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원수는 누군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인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대적하는 이인가? 공공의 적이나 흉악범인가? 북한이 원수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차원에서 위기이다. 첫째, 실제 삶에서 원수사랑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을 붙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의 영혼은 지친다. 둘째, 정의로운 투쟁을 망설이게 만든다. 히틀러를 술 취한 버스 운전자로 보고 승객을 살리기 위해서 일단 폭력적으로라도 그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실천했던 본회퍼에게 원수사랑 운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원수사랑은 도대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에 대한 완료된 대답은 아직 없다. 설교자는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나름으로 답을 제시해야 한다.

필자가 볼 때 원수사랑이 말하려는 핵심은 48절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이 처한 삶의 자리가 유대교의 압박이라는 앞에서의 언급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에게 약점을 잡힐 수 있었다. 율법 폐기론에 떨어질 위험성을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온전한 의를 추구해야 한다. 인간이 하늘의 아버지처럼 온전할 수는 없지만 온전해야 한다는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 긴장이 있다. 이 긴장을 간단히 털어내지 않고 실존적으로 끌어안고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여기서 설교를 마감해도 좋지만,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온전함이, 즉 칭의가 이런 영적 긴장감의 토대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도 있다. 설교의 진도를 어디까지 나갈 것인지는 설교자가 선택할 일이다.

 

2011년 2월27일/ 주현절후 여덟째 주일

주께서 오신다

 

고전 4:1-5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독특한 위치에서 활동했다. 그는 자칭 사도였다. 예수의 생전에 한 번도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열두 사도들에 비해서 정통성이 훨씬 떨어졌지만 그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역동적으로 예수의 사도로서 자리를 지켰다.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그는 베드로와 바나바의 위선을 책망할 정도였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와도 사이가 좋다고는 볼 수 없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문제 인물로 낙인찍혔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가게 되었다는 사도행전 보도는(행 16:9,10) 유대 그리스도교의 세력에 밀려났다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심한 갈등이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여러 파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 아볼로, 게바, 그리스도 파가 그것이다.(고전 1:12) 이런 문제를 바울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고전 1-4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나선 사람들이 파당을 나눈다는 사실이, 더구나 대립적으로 나뉜다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웠겠는가. 바울은 입장을 정리해야만 했다. 일종의 자기변호인데, 그것이 위 설교 본문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세 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충성이 그것이다. 충성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이 용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작은 일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기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한다.(3절) 대단한 영성이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자신감이 없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책할 아무 것도 없었다. 여기에 바울의 고유한 인식론이 자리한다. 사람의 인식과 판단은 잠정적이다. 결정적인 판단은 주님이 몫이다.(4절)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5절) 주가 어둠에 감춰진 것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한다. 고전 13:12절에서도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주가 오신다는 말, 감춰진 것, 판단 유보가 무엇인가?

설교자는 판단 유보를 현상학의 태두 E. 후설이 말하는 ‘판단 정지’ 개념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계시의 종말론적 성격도 알아야 한다. 그 문제는 각자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주께서 오신다는 말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니까 간단히 짚어야겠다.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으면 설교할 내용이 없으며, 설교의 방향도 왜곡될 수 있다. 이것이 예수의 재림을 말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재림의 주는 바로 2천 년 전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를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서른 살 초반의 역사적 예수로 다시 온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들림을 받아(승천)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자, 즉 부활의 세계로 들어간 자다. 그가 온다는 말은 부활 생명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 순간이 오면 잠정적인 인식은 모두 제거된다. 세상의 자연과학적 판단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의 인식론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감춰진 것, 여전히 비밀인 것이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인식과 판단은 이렇게 종말론적이어야 한다.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우리의 모든 시시비비가 무용지물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진리 논쟁에 치열하게 참여했다. 예수도 안식일 논쟁에서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바울은 온 몸으로 유대교 및 유대 그리스도교와 싸웠다. 논쟁 없이는 진리가 세워지지 않는다. 문제는 독단적인 태도에 있다.(고전 4:6) 한국교회의 타종교 비난 같은 것들이 독단이다. 진리에 열린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과 독단적인 태도로 상대방을 재단하는 것은 극과 극으로 다르다. 오늘 설교자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결론적으로 ‘주께서 오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모든 인식론적 토대를 설정하는 것이 이 설교의 핵심이다. 설교자들은 그것을 밀고 나갈만한 해석학적이고 영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이럴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으며, 세상의 판단으로부터, 또한 바울의 표현대로 자신의 인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겸손과 자유가(K. Barth,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20쪽 참조) 주현절 영성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대구성서아카데미 2011년 1월 설교공부 강의안, 기독교사상 2월호 게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