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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9:1-7 - 예수는 빛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by multimillionaire oz 2019.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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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16일/ 주현절후 둘째 주일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이사야 49:1-7

1.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2.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3.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6.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구약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선택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모세를 선택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다. 선택이라는 말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선택이 무의미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위 본문에서 선택을, 또는 부르심을 반복한다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팽배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바벨론 포로이다. 이사야를 비롯해서 중요한 선지자들은 거의 이 사건을 전후해서 활동했다. 그런 맥락에서 선민사상은 더 확고해졌다.

위 본문의 표현은 적나라하다. 하나님이 태에서, 복중에서 부르셨다고 한다. 태와 복중이라는 포현은 하나님의 선택이 존재론적이라는 뜻이다. 나의 의지와도 무관하다. 설교자는 일단 이 사태를 정확하게 붙들어야 한다. 칼뱅의 이중예정도 이런 존재론적 차원을 가리킨다. 이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런 주장이 극단으로 나가면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선택이 존재론적인 사건이라면 결국 결과에 대한 책임이 사람에게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우리 의지를 넘어서지만 우리의 응답을 배제하지 않는다.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의 부르심에 응할 것이며, 부르심에 응하는 것이 곧 태에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소명에 부응했지만 책임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선지자의 영적 갈등이었다. 4절에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헛되이 수고했고, 무익하게 힘을 썼다고 한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피력한 것이다. 여기서 소명은 두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이사야 개인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소명을 받아서 활동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생전에 성공한 선지자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얼마나 될까?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어야했지만 그런 소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악의 상황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회의적으로 보게 할 만한 상황이다.

이제 이사야 선지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선택을 포기하고 대신 심판을 말해야 하는가? 이사야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멸시당하는 자, 미움을 받는 자, 종이 된 자들을 여호와께서 붙들어주신다는 것이다.(7a) 이 사실을 보고 왕들이 일어서고, 고관들이 경배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의 근거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이사야의 신탁은 참으로 끈질기다. 패배의식과 냉소가 가득할만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선택을 줄기차게 선포했다. 이것이 옳은 선포인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의 선포가 실증으로 나타났나? 그렇지 못했다. 설교자는 이 맥락에서 분명한 방향을 찾아야 한다. 이사야의 선포는 옳다는 사실과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뚫고 들어가서 말씀의 중심을 찾아야 한다.

그 중심을 우리는 이사야의 신탁이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구약을 설교 본문으로 할 때는 신약의 관점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결국 케리그마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정리된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참된 회복이 가능하다. 3)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여호와의 선택이다. 그의 선재적 은총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를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다.

 

 

2011년 1월23일/ 주현절후 셋째 주일

예수는 빛이다

 

마 4:12-22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위 본문은 두 가지 전승을 전한다. 하나는(12-17) 세례 요한의 구금 이후 시작된 예수 활동을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과 연결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18-22)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다. 아주 간단한 두 이야기를 설교자는 어떻게 연결시켜야 하며, 어떤 주제를 전해야 하나?

마태가 세례 요한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설명을 설교에서 자세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설교자는 나름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다. 선지자 전통이 끝나고 이제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선지자와 메시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지자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요한의 선배라 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여기서 인용된 건 당연하다. 사 9:1,2절에는 흑암, 큰 빛, 사망의 땅, 그늘 등의 단어가 키워드로 나온다. 독자들은 마태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 챌 수 있다. 이사야가 전한 빛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여기서 빛과 메시아니즘의 관계를 알고 있어야 한다. 빛은 생명, 구원에 대한 메타포다. 창세기의 창조보도에 나오는 첫 창조는 빛이었다. 예수가 빛이라는 성서의 주장을 전하려면 세상이 흑암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왜 세상이 어둠인가? 왜 메시아가 와야만 하나? 여기서 설교자는 두 가지 관점으로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1) 인간의 실존은 흑암이다. 인간 스스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 오늘처럼 풍요의 세계에서도 흑암이 여전하다. 2) 흑암의 존재론적 근거는 죄다. 교만, 자기사랑, 자기연민, 자기집중이라 할 죄는 인간 삶을 총체적으로 파괴한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유대인은 율법으로, 이방인은 율법 없이 죄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가 왜 빛인가? 선지자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런 질문들을 깊이 있게, 설득력 있게 전하려면 예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총체적으로 알아야 한다.

선지자는 죄를 나열하고 비판하는 반면에, 메시아는 죄의 용서를 선포한다. 메시아인 예수는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했다. 그에게만 그런 영적 권위가 있었다. 사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된다. 이것이 바로 빛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 예수라고 한다면 그가 빛이라는 말이 옳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 답을 잘 알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를 통해서 일어난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다. 이런 대답은 자칫 상투적인 것으로 보인다. 설교자는 이런 기초적인 교리를 상투적이지 않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해 보이는 교리의 속살 안으로 들어갈 때 그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바로 설교의 깊이가 달라진다.

마태는 예수를 빛으로 말한 뒤에 제자의 소명을 전한다. “나를 따라오라.” 빛을 본 자는 당연히 그 빛을 따르게 되어 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말 그대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가끔 오해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라 빛을 반사할 뿐이다. 다른 하나는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던진다는 것이다. 현재와 미래 운명을 포함한 모든 삶을 예수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대목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한다. 모든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무조건 교회생활에 전념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속의 삶에서 예수와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대목에서는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뒤따름(Nachfolge Christi)에 대한 신학적 개념이 도움을 줄 것이다.

결론에서는 주현절의 의미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도 좋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믿는 우리가 이제는 그 사실을 말과 삶으로 전해야 한다고 권면할 수도 있다. 이런 설명이 진부한 듯 보이지만 설교자가 주현절의 영성을 확보하고 있으면 청중들에게 분명히 전달될 것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바르게 알고 정확하게 전하기만 하면 말씀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청중들의 영혼을 고유한 방식으로 자극할 것이다.

 

대구성서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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